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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여행]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수학여행


글 박은경 사진 박은경,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관광공사 DB

창경궁에서 제주도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

지난 50년간 누군가에게는 장기자랑의 무대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휴식처였을 그때 그 여행지들.


수학여행 새우잠을 자도 마냥 즐거웠던 잊지 못할 시간들.

수학여행의 메카 경주

시대를 초월해 경주를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수학여행. 똑같은 교복 차림에 까까머리 남학생과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하루를 꼬박 달려 찾은 경주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들었다.

1970년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 대다수의 중고교 학생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아다니며 역사의 혼을 느끼고 사진으로 추억을 남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봄가을 서너 달 사이에 집중된다는 게 문제였다. 학생들은 턱없이 부족한 숙박시설에 새우잠을 자가며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고, 신문에는 수학여행을 떠나 식중독에 걸린 학생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심지어 1973년에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200여 명의 원주고등학교 학생들이 숙소를 잡지 못해 다방과 식당의 홀에 앉아 밤을 새우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한편 1972년에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생 60여 명이 우리나라로 수학여행을 오면서 화제가 됐다. 이들은 페리를 타고 부산에 도착, 나흘간 경주와 부여, 서울을 둘러본 후 항공편으로 귀국했다.

시골 학생들의 로망 서울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탔어요. 꼭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요.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건물들도 아주 높아요.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싶어요"


서울 학생들이 경주를 비롯해 설악산, 속리산, 강릉 등에서 자연을 마주하며 추억을 쌓았다면, 지방 학생들은 서울로 올라와 번화한 도심을 만끽하며 견문을 넓혔다. 


역사 체험이 가능한 창덕궁, 경복궁은 물론 현대식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남산과 어린이회관 등이 주요 코스였다.

능동 어린이대공원 역시 단골 장소였다. 73년 5월5일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연 어린이대공원은 개원 초기에는 하루 입장객이 30여만 명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용인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드림랜드, 롯데월드 등 첨단 종합위락시설이 속속 문을 열면서 어린이대공원의 관람객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Posted by 탑스미네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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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 타임머신①] 5060세대들의 청춘시절, 연애의 재발견

‘슈퍼스타K 시즌5’ 화제의 참가자 김대성 스테파노의 연애시절 이야기


70~80년대 나눴던 연애방식을 추억 따라 가보자.

데이트장소, 사랑의 징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 등에서 묻어난 추억속의 아련한 커뮤니케이션이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편집자 주>



# 1981 명동...

M.net ‘슈퍼스타K 시즌 5’에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는 김대성 스테파노(60)씨. 그는 아내와의 이야기로 유명해졌다. 방송에서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20년 전 사별한 아내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결혼 이야기보다 결혼 이전의 이야기가 더 극적이다.

때는 1981년. 그 해는 김씨가 힘들었던 군대를 전역한 해였다. 이 땅의 모든 청춘이 그렇듯 김씨도 전역이라는 해방감을 친구들과 함께 누리고 있었다. 장소는 서울 명동의 조선호텔 건너편 ‘포시즌’이라는 술집. 늘 그렇듯 전역 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다. 회포는 거하게 풀었지만 고민에 대한 답은 시원치 않았다. 이윽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김씨의 앞에 눈부신 아가씨가 지나갔다. 대뜸 그 빨간 원피스의 여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지금 세대였다면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락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흉흉한 요즘이라면 자칫 치한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첫눈에 반한 그녀를 놓치기 싫었던 김씨는 버스 안에서 용기 내 운을 뗀다. 정말 ‘대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만납시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말에 그녀가 진저리를 치며 얘기한다. “당신 미쳤어요?” 그야말로 미친 놈 취급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리는 정류장에 따라 내린 것.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집 전화번호를 건넸다. 연락을 달라고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간절하게 부탁했다.

“3월 1일 1시, 명동에 있는 서울 다방에서 기다릴게요.”

떨리는 한마디를 꺼낸 뒤 그는 유유히 사라졌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면서 설렘은 커져갔다. 근데 정말 공교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약속된 날짜를 이틀 남겨놓고 김씨가 급성 맹장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3월 1일 1시 서울다방’ 뿐.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친구에게 부탁해 혹시 그녀가 오면 내 상황을 설명해 주라고 한 것. 그러나 그것도 헛수고였다. 그녀는 서울 다방에 나오지 않았다. 김씨에게 ‘3월 1일 1시 서울다방’ 은 메아리 없는 설렘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구에게 한 가지 더 부탁했다. 여기에 왔다 갔다는 쪽지를 다방에 남겨달라고 말이다.

원본보기
메모와 쪽지는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휴대폰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로맨스, 인스턴트 로맨스가 아닌 아날로그 로맨스, 기다림의 로맨스였던 것이다.

김씨에게 그녀는 옷깃만 스친 인연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잊히지 않았다. 퇴원 후,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지만 무작정 망원동 홀트아동복지회로 향했다. 첫 만남 당시 알고 있던 정보인 ‘망원동의 조씨’라는 것만 믿고 말이다. 당시 망원동 교통의 요지는 ‘홀트아동복지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기다리면 그녀와 마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곳으로 출퇴근한 지 하루, 이틀, 사흘을 지나 열흘이 흘렀다. 그러나 마주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아니 끝인 듯 했다.

그렇게 잊혀가는 듯했다. 금세 일상으로 돌아왔다.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어느새 가을이 됐다. 선배가 명동에서 운영하는 구둣가게를 찾았다. 선배와 일상적인 대화의 꽃이 무르익을 무렵 김씨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눈을 찡그리며 실눈을 뜨고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망원동 그녀였다. 이야기를 끊고, 선배에게 물었다.

“저기 일하는 사람 망원동 살아요? 혹시 성이 조씨예요?”

선배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씨는 확신했다. ‘이게 인연이라는 거구나.’ 이후 상황은 급진전됐다.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도 생겼고, 만남도 가졌다. 그리고 3월 1일 서울 다방에 왜 나오지 않았는지, 망원동에서는 왜 보이지 않았는지 모두 들을 수 있게 됐다. 다소 불량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만남에 응하지 않았던 것. 망원동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은 공교롭게도 3월 1일 즈음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악에 미쳐 베짱이 같은 놈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만남과 만남이 이어져 애정에 싹이 텄다. 남한강 데이트, 일터 데이트 등을 통해 애정을 키워나간 끝에 그들은 결혼에 골인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애틋한 사랑. 7080을 살았던 세대들의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에는 순수함이 있다. 요즘 세대들은 편지를 전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편지지를 몇 번이고 찢고 찢은 이야기를 믿기나 할까. 편지와 메모 그 필체에서 전해지는 진한 감성은 점차 사라져 간다. 7080을 살아온 세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길.

출처  브라보마이라이프, 양용비 기자 dragonfly@bravo-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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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보다 더 어렵게 정글전자에 입사한 재규어 씨. 그는 자기 몸값이 얼마인지 궁금하다. 그는 몸값을 계산하기 위해 우선 30년 동안 해마다 5,0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고 가정했다. 물론 이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가정이다. 그의 실제 연봉은 2,000만원부터 1억원에 이르기까지 들쭉날쭉할 것이다. 그가 한 일터에서 30년을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미래는 어차피 불확실한 것이다. 지금 재규어 씨가 알고 싶은 것은 회사에 자신의 노동을 과연 얼마에 팔았는지 얼추 따져본 금액이다. 그래서 계산이 너무 복잡해지지 않도록 연봉이 일정하고 30년 동안 잘릴 염려도 없다고 가정한 것이다.

금리와 몸값

재규어 씨가 30년 동안 받을 몸값을 단순히 합하면 15억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5억원의 현재가치(present value)다. 현재가치는 미래 현금흐름(cash flow)을 어떤 이자율로 할인(discount)하는 방식으로 구해야 한다. 재규어 씨는 그 할인율(discount rate)을 5%로 잡았다. 셈을 단순하게 하기 위해 연봉은 매년 연말에 받는다고 가정했다. 이 경우 그가 30년 동안 받을 연봉 총액의 현재가치는 7억6,862만원이다. 그가 노동의 대가로 해마다 5,000만원씩 30년 동안 받는 것이나 지금 한꺼번에 7억6,862만원을 받는 것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재규어 씨 연봉의 현재가치를 구하는 셈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그가 1년 후 받을 5,000만원의 현재가치는 5,000만원을 5%의 이율로 할인한 금액인 4,761만원이다. [5,000만원/(1+0.05)=4,761만원] 2년 후 받을 5,000만원을 연리 5%로 할인한 금액은 4,535만원이다. [5,000만원/(1+0.05)2=4,535만원] 30년 후 받을 5,000만원의 현재가치는 1,156만원에 불과하다. [5,000만원/(1+0.05)30=1,156만원] 먼 미래에 받을 돈은 가까운 미래에 받을 돈보다 가치가 적다. 매년 받을 연봉의 현재가치를 각각 구해 모두 더하면 7억6,862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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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계산을 서른 번이나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의 공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해마다 일정한 연봉을 30년 동안 받는 것은 일정한 액수의 연금(annuity)을 30년 간 지급받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연금의 현재가치(present value of an annuity)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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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PVAn는 n개의 기간 중 받을 연금의 현재가치를 모두 더한 값이며, A는 매 기간 말에 받을 일정한 연금액, i는 현재가치를 구하는 데 적용한 할인율이다. 이 공식에 대입해 재규어 씨 연봉의 현재가치를 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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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수식만 보면 소름이 돋는 카푸친 씨는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겠지만 연금의 현재가치를 구하는 공식이 어떻게 나왔는지 유도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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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식 양변에 (1+i)을 곱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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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서 (1)을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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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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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 씨가 적용한 할인율이 5%가 아니라 7%라면 그의 연봉의 현재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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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율이 3%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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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 실세금리가 올라갈수록, 그래서 할인율이 높아질수록 미래소득의 현재가치로 가늠한 재규어 씨 몸값은 떨어진다. 반대로 같은 연봉을 받더라도 금리가 떨어질 때는 그의 몸값은 올라간다.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10억원을 은행에 넣어두고 그 이자만 갖고 놀고 먹는 피라냐 씨는 금리가 5%일 때 연 5,000만원의 이자 수입을 얻는다. (이자소득세는 무시한다.) 이 때 놀고 먹는 피라냐 씨는 열심히 일하는 재규어 씨와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금리가 3%로 떨어지면 연 소득은 3,000만원으로 줄어든다. 5,000만원의 이자소득을 얻으려면 상속재산이 16억6,666만원은 돼야 한다.

몸값을 올리기 위한 투자는 남는 장사일까

재규어 씨는 좀 더 현실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몸값을 따져보려 한다. 연봉은 30년 동안 일정한 게 아니라 첫 해 3,000만원으로 시작해 해마다 7%씩 인상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매 기간 일정한 비율로 늘어나는(성장하는) 연금의 현재가치(present value of a growing annuity)를 구하는 공식을 통해 간단히 계산해볼 수 있다. [이 식의 유도과정을 풀어놓는 것은 카푸친 씨를 심하게 고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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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A는 첫 해 (말에 받는) 연금액, g는 연금의 일정한 증가율(성장률)이다. 이 식에 대입하면 30년 동안 매년 7%씩 늘어나는 재규어 씨 연봉의 현재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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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 씨는 몇 년 동안 직장을 다니다 뜻한 바 있어 명문 정글대학원에서 새로운 지식을 충전하기로 했다. 정글경제학 석사 학위를 따면 몸값이 크게 뛸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기회비용(opportunity cost)도 적지 않다. 2년 동안 일을 중단하고 등록금도 내야 하는 것이다. 재규어 씨는 한 해 4,000만원씩 2년 치 연봉을 포기해야 한다. 등록금은 한 해 1,500만원씩 들어간다. (연봉은 연말에 받고, 등록금은 연초에 낸다.) 학위를 마치면 연봉은 5,200만원으로 뛴다. 그는 졸업 후 25년을 더 일할 수 있다. 그의 투자는 과연 남는 장사일까? 주먹구구 셈법으로 알아보자. 학위를 따는 데 들어가는 비용(포기한 연봉과 등록금)의 현재가치와 학위를 따서 얻을 이익(늘어난 연봉)의 현재가치를 비교해보면 된다. 할인율은 5%를 적용한다.

(1)등록금의 현재가치 1,500+1,500/(1+0.05)=2,928만원

(2)포기한 연봉의 현재가치 [4,000/(1+0.05)]+[4,000/(1+0.05)2]=7,437만원

(3)학위 취득 비용의 현재가치 (1)+(2)=1억365만원

(4)학위 취득 후 늘어난 연봉의 현재가치

(4.a)2년 후 시점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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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현재 시점의 가치: 1억6,912만원/(1+0.05)2=1억5,339만원

(5)학위의 순현재가치(net present value) (4.b)-(3)=4,974만원

학위를 따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생각의 힘을 기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출처:NGD>

결론적으로 재규어 씨의 투자는 남는 장사다. 물론 이는 너무 단순한 셈법이다. 유무형, 직간접적인 비용과 수익을 보다 정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또한 학위 취득과 연봉 인상을 연관시킨 것은 편의적인 설명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생각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옵솔리지(obsoledge, obsolete와 knowledge를 합성한 말)라고 일컬은 쓸모 없는 구닥다리 지식만 쌓는 건 아까운 시간과 돈을 버리는 것이다. 학력 인플레이션 때문에 학위가 주는 신호효과(signaling effect)도 떨어진다.

지식일꾼이 되려는 카푸친 씨



지식기반경제의 핵심적인 자본이 지식이라면 지식일꾼은 노동자인 동시에 자본가일 수도 있다. 
<출처:NGD>

지식은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인적자본이라는 말은 1964년 게리 베커(Gary Becker) 당시 컬럼비아대 교수(현재 시카고대 교수)가 ‘인적자본(Human Capital: A Theoretical and Empirical Analysis, with Special Reference to Education)’이라는 책을 발간한 후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가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탄 후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이제 지식과 창의력, 신뢰, 건강, 사회적 네트워킹 능력을 비롯해 개인의 생산성과 몸값을 높이는 인적자본 투자의 중요성은 누구나 이해하고 있다.

카푸친 씨는 임금 노동자의 비애를 느끼지 않는 지식일꾼이 되려 한다. 지식기반경제(knowledge-based economy)의 핵심적인 자본이 지식라면 지식일꾼 카푸친 씨는 노동자인 동시에 자본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푸친 씨의 인적자본 투자전략은 많은 리스크를 안고 있다. 문제는 짙은 안개 속에 숨어있는 미래에 어떤 지식이 가장 비싸게 팔릴지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장경덕 이미지
장경덕 |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1988년 매일경제 기자로 정글경제 탐사를 시작했다. 금융과 투자의 개념과 원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글을 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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