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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한 고집으로 레드(red)에 돈을 걸었다. …난 극단적인 모험을 해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나는 모험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주위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소리쳤다. 이미 열 네 번이나 레드가 나온 다음이란 말이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의 소설 [노름꾼(The Gambler)]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카지노에서 트랑테 카랑트(trente et quarante)라는 카드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이 게임은 룰렛(roulette)처럼 블랙(black)과 레드(red)로 나뉜 카드 열(row) 중 한 쪽이 이길 것으로 보고 돈을 거는 것이다. (카드 숫자의 합이 30에 가까운 열이 이긴다.) 구경꾼들은 이미 여러 차례 잇달아 이긴 레드가 또 다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이바노비치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하지만 생각이 짧은 건 바로 그들이었다.

도박사의 오류



도박사의 오류는 잘못된 추론의 한 예를 보여준다. <출처:NGD>

이바노비치는 이틀 전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주 레드가 잇달아 스물 두 번이나 이긴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레드가 열 번쯤 잇달아 이긴 다음부터는 또 다시 레드가 나올 것으로 보고 돈을 거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초심자들은 레드가 열 여섯 번 연속으로 이긴 다음이라면 열 일곱 번째는 틀림없이 블랙이 이길 것으로 믿고 평소보다 두 배, 세 배 많은 돈을 블랙에 걸었다. 그리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소설 속 이야기는 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라 일컫는 잘못된 추론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룰렛 구슬이 블랙이나 레드에 멈출 확률은 같다. 하지만 이는 수백, 수천 번 구슬을 굴렸을 때의 이야기다. 짧은 기간에는 얼마든지 그 확률과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카푸친 씨가 게임을 한 어느 겨울 밤 레드가 스무 차례나 잇달아 나오는 희한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다음에는 당연히 블랙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는 뜻이다.

더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똑 같은 동전 던지기의 경우다. 동전이 스무 번 연속 앞면이 나올 확률은 1,048,576분의 1이다. [(1/2)20=1/1,048,576]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첫 번째 동전을 던지기 전에 기대하는 확률이다. 이미 열 아홉 번 연속으로 앞면이 나온 다음이라면 스무 번째 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올 확률은 그냥 2분의 1이다. 열 아홉 번 연속 앞면이 나온 것은 분명 희한한 일이지만 이미 100% 확정된 사실이며 그 사실은 스무 번째 던지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무심한 동전은 지난 열 아홉 번의 던지기 결과가 어땠는지 기억할 리 없다.)

동전 던지기에서 열 아홉 번이나 앞면이 나왔으니 이제 뒷면이 나올 때도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듯이 카푸친 씨가 “지난 몇 년 동안 주식 투자에서 줄곧 돈을 잃기만 했으니 이제 돈을 벌 때도 됐다”고 생각한다면 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물론 투자 실패가 거듭되면 학습효과가 나타나 다음 번 투자의 성공 확률이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몇 번이나 연거푸 돈을 잃었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는 단순한 추론은 도박사의 오류와 다를 바 없다.)

직장인 야구에서 2할5푼대 타율을 자랑하는 재규어 씨가 10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으니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이 안타를 칠 거라고 믿고 내기를 거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재규어 씨가 그 동안 구질을 잘 분석하고 스윙 폼을 더 좋게 고쳤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행동경제학자들의 화두가 된 휴리스틱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에서 도박사의 오류를 풀이할 때 대표성 휴리스틱(representativeness heuristic)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휴리스틱(heuristic)은 ‘찾아내다’ ‘발견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로, 불확실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풀기 위해 쓰는 주먹구구식 셈법이나 직관적 판단, 경험과 상식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 즉흥적인 추론을 뜻한다.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휴리스틱은 불확실성 하의 의사결정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으로 떠올랐다. 트버스키와 카너먼은 1974년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한 논문(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에서 대표성 휴리스틱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찾아내다’라는 뜻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휴리스틱’은 불확실성 하의 의사결정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으로 떠올랐다. <출처:NGD>

대표성 휴리스틱은 어떤 개별적인 대상 A가 B라는 부류(class)의 특성들을 ‘대표(represent)’하는 것으로 보일 때 곧바로 ‘A는 B에 속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마존은 정글의 여러 가지 특성을 대표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따져 볼 것 없이 ‘아마존은 정글’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A와 B는 일련의 사건(sequence)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가 열 번의 연속적인 룰렛 게임, B가 만 번의 연속적인 룰렛 게임이라고 할 때 A는 B의 특성을 대표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아주 짧은 일련의 사건들이 훨씬 더 길게 이어지는 사건의 전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그 특성을 잘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앞면(H)과 뒷면(T)이 나타날 확률이 똑 같은 동전을 여섯 번 던졌을 때 H-T-H-T-T-H 순서로 나타날 가능성이 H-H-H-T-T-T 또는 H-H-H-H-T-H보다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건들은 동전 던지기가 무작위(random)가 아닌 것 같고 세 번째 것은 앞면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지도록 동전이 찌그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도박사의 오류는 이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확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룰렛 구슬을 수없이 많이 던지면 블랙과 레드가 나타나는 빈도가 같아지겠지만 수십 번 던졌을 때는 어느 한 쪽에 편중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박사(엄밀하게 말하면 도박의 초심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잇달아 레드가 나타났다면 다음에는 레드보다 블랙이 나오는 게 룰렛의 특성을 더 잘 대표하는 것이라고 보고 그런 결과를 예측하는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카푸친 씨의 직업은 뭘까

‘카푸친 씨는 매우 수줍음이 많고 내향적이다. 그는 언제나 도움이 되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나 현실 세계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온순하고 깔끔한 사람이며, 질서와 체계, 그리고 디테일에 대한 열정을 필요로 한다. 카푸친 씨의 직업은 (농부, 세일즈맨, 항공기 조종사, 도서관 사서, 엔지니어 중)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카푸친 씨가 도서관 사서의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한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심각한 오판이 될 수도 있다. 카푸친 씨의 성격과 도서관 사서의 특성이 비슷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사서일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사전확률(prior probability)을 무시할 때 오판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특정 직업에 대한 대표성에만 주목한 이 추론은 기본적으로 카푸친 씨 또래 가운데 사서보다는 농부가 100배나 더 많을 수도 있는 직업별 분포를 무시한 것이다.

표본의 크기(sample size)에 대해 둔감해서 오판을 하는 경우도 많다. 트버스키와 카너먼은 다음과 같은 실험결과를 소개했다.‘정글타운에 병원이 두 곳 있다. 큰 병원에서는 하루 평균 45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작은 병원에서는 15명이 탄생한다. 잘 알다시피 모든 아기의 50%는 남자다. 그러나 정확한 성비는 날마다 다르다. 어떤 날은 남자 아기가 50%를 넘고 어떤 날은 그 수준을 밑돈다. 두 병원은 태어난 아기의 60% 이상이 남자였던 날이 1년에 며칠이나 되는지 기록했다. 두 병원 가운데 그런 날이 더 많은 병원은 어디였을까?’ [실험 대상 대학생 가운데 21명은 큰 병원, 21명은 작은 병원이라고 답했고, 53명은 두 병원에서 (남자 아기가 60% 이상이었던 날 수가) 거의 같았을 거라고 답했다.]

가용성 휴리스틱은 가장 쉽게 찾아 쓸 수 있는 데이터나 기억의 바다에서 가장 빨리 건져 올릴 수 있는 생생하고 도드라진 정보를 활용해 판단하는 것이다. <출처:NGD>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은 가장 쉽게 찾아 쓸 수 있는 데이터나 기억의 바다에서 가장 빨리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생생하고 가장 도드라진 정보를 활용해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국인의 사망원인 1위는 단연 암이다. 그렇다면 사망원인 2위는 무엇일까? 정확한 통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기억에 의존해 답을 내놓을 것이다.친지 몇 사람을 교통사고로 잃은 기억이 생생한 이는 사고사, 친구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이는 자살의 빈도를 실제보다 더 높게 판단할 수 있다. 끔찍한 테러나 살인사건에 대한 매스컴 보도는 타살에 대한 기억을 부풀릴 수 있다.

[2009년 인구 10만명 당 암으로 사망한 이는 140.5명에 달했다. 그 다음은 뇌혈관질환(52명), 심장질환(45명), 자살(31명), 당뇨병(19.6명), 교통사고(14.4명) 순이었다. 10년 전에는 교통사고가 4위, 자살이 7위였다. 10~30대 젊은 층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 가용성 휴리스틱은 구체적인 사례를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엄청난 금융위기와 패닉(panic)을 경험한 투자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투자의 리스크(risk)를 더 높게 평가하고, 큰 지진이나 화재를 막 겪은 이들은 더 적극적으로 보험에 들려 할 것이다.

휴리스틱을 통한 판단에 의존하면 어떤 기준점에 얽매이는 이른바 심리적앵커링(anchoring)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불완전한 계산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도 앵커링 효과가 나타난다. 트버스키와 카너먼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5초 동안 암산으로 다음 두 곱셈의 답을 내라고 주문했다.

[첫 번째 그룹의 암산 문제] 8 x 7 x 6 x 5 x 4 x 3 x 2 x 1 = ?
[두 번째 그룹의 암산 문제] 1 x 2 x 3 x 4 x 5 x 6 x 7 x 8 = ?

첫 번째 그룹 학생들이 제시한 답의 중간값(median)은 2250, 두 번째 그룹이 내놓은 답의 중간값은 512였다.
[정답은 40,320이다.]

주먹구구 셈법은 얼마나 믿어야 하나

카푸친 씨는 고성능 컴퓨터와 같은 계산능력을 가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아니다. 그런 카푸친 씨가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데 휴리스틱은 매우 유용한 의사결정 방식일 수 있다. 정글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젤 무리는 사자의 기척만 느껴도 이리저리 따져보지 않고 일단 뛰고 본다. 차분하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다. 직관과 주먹구구로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휴리스틱은 인간의 중요한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휴리스틱은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 주먹구구의 한계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카푸친 씨는 자신의 주먹구구 셈법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과신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장경덕 이미지
장경덕 |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1988년 매일경제 기자로 정글경제 탐사를 시작했다. 금융과 투자의 개념과 원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글을 쓰려 한다.


Posted by 탑스미네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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