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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여행]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소풍


창경궁에서 제주도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

글 박은경 사진 박은경,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관광공사 DB

지난 50년간 누군가에게는 장기자랑의 무대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휴식처였을 그때 그 여행지들.

소풍 김밥 두 줄에 탄산음료 하나. 소박하고 따사로운 추억들.

1960~70년대 봄 소풍의 단골 코스이자 밤 벚꽃 놀이의 명소였던 창경궁(당시 창경원)은 서울에서 놀 거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을 비롯해 식물원, 케이블카, 공중열차 등 위락시설이 즐비했고, 봄이면 벚나무에 휩싸여 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모두 일제의 산물이었다. 1909년 일제 통감부는 창경궁을 허물어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했으며, 1911년에는 궁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창경원으로 개칭하고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마구잡이로 심었다.


그러나 그 당시 창경원의 놀이시설은 뼈아픈 역사마저 가릴 만큼 독보적이었다. 평일에는 아이들의 소풍행렬이 이어졌고 휴일이면 나들이에 나선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또 매표소 앞에서는 입장권을 먼저 사려는 사람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풍 나온 아이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동물원까지 밀려나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게다가 밤이면 "나체팅"을 즐기려는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밤(나이트) 벚꽃(체리블라섬) 미팅"의 앞뒤 글자를 하나씩 뽑아 만든 나체팅은 7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처럼 번지며 한때 큰 인기를 끌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암표는 물론 위조 입장권까지 성행했다. 주변 식당가에서는 당시 400원 하던 비빔밥을 500원으로 올려 받는 등 바가지요금이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창경원의 독주는 1984년부터 진행된 창경궁 복원 사업에 의해 역사를 멈췄다. 놀이시설은 모두 철거됐고 벚나무는 어린이대공원과 여의도로 옮겨졌다. 또 동물들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1986년 지금의 창경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반세기를 이어온 명물 남산 케이블카

1962년 5월 처음 운영을 시작한 이래 50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의 명물. 운영 초기 탑승요금은 편도 20원으로,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값이 약 2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참고로 현재의 케이블카 대인 편도 요금은 6000원, 짜장면 가격은 4000원 내외)

남산 케이블카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며 서울의 대표 위락 시설로 자리를 잡아갔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팔각정에 들러 시내 전경을 감상했다.


1964년에는 케이블카 안에서 남녀 한 쌍이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28세였던 최상만 군과 정영순 양은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전남 영광에서 서울까지 올라왔고, 케이블카 안에서의 특별한 결혼식을 통해 부부로 거듭났다.


한편 남산타워는 1980년 처음으로 전망대를 공개하면서 관광오락시설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69년 전파탑과 관광용 전망대를 목적으로 착공됐으나, 보안상의 이유로 1975년 체신부가 인수․운영해오다 5년만에야 비로소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Posted by 탑스미네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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