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 50주년을 맞이하여 그녀가 아름다웠던 최고의 순간들을 모아봤다.

'마이 페어 레이디(1964)' 50주년 기념 사진 모음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1953) 덕분에 어린 오드리 헵번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일탈을 즐기는 공주의 역할을 맡았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헵번은 스타일링 감각이 뛰어났다. 1953년 오스카 시상식에 지방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모습.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1953년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수상 후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로맨틱 코미디 '사브리나'(1954)의 스틸컷. 그녀의 자연미를 너무나도 잘 담아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사브리나(1954)' 촬영 세트장에서 장난기 가득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는 그의 옷으로 헵번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헵번이 지방시의 옷을 입고 '사브리나' 촬영장에 앉아 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그의 옷을 입었을 때 저는 가장 저다운 모습이에요." 헵번은 

디자이너 지방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보여준 패션이 스타일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그녀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헵번이 입었던 리틀 블랙 드레스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의상 중 하나로 꼽힌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그녀는 사석에서도 '스타일리시함' 그 자체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공동 주연배우 조지 페파드와 촬영 중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의 유명한 블랙 앤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마이 페어 레이디(1964)' LA 시사회에서 흰색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밞아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뜨거운 포옹(1964)'에서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의 비서 가브리엘 심슨을 연기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파리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나이 든 헵번.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우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영화 '백만달러의 사랑(1966)'에서는 모자를 쓰기도 했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1967)' 속 패션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진.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헵번은 “여성의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영혼에 반영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1966년 해변가에서 빨간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 

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오드리 헵번'

1993년 헵번이 사망한 이후에도 그녀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진은 그녀가 생전에 입었던 드레스를 내놓은, 파리의 한 경매장.










Posted by 탑스미네랄
|

[반가운 여행]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소풍


창경궁에서 제주도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

글 박은경 사진 박은경,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관광공사 DB

지난 50년간 누군가에게는 장기자랑의 무대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휴식처였을 그때 그 여행지들.

소풍 김밥 두 줄에 탄산음료 하나. 소박하고 따사로운 추억들.

1960~70년대 봄 소풍의 단골 코스이자 밤 벚꽃 놀이의 명소였던 창경궁(당시 창경원)은 서울에서 놀 거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을 비롯해 식물원, 케이블카, 공중열차 등 위락시설이 즐비했고, 봄이면 벚나무에 휩싸여 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모두 일제의 산물이었다. 1909년 일제 통감부는 창경궁을 허물어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했으며, 1911년에는 궁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창경원으로 개칭하고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마구잡이로 심었다.


그러나 그 당시 창경원의 놀이시설은 뼈아픈 역사마저 가릴 만큼 독보적이었다. 평일에는 아이들의 소풍행렬이 이어졌고 휴일이면 나들이에 나선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또 매표소 앞에서는 입장권을 먼저 사려는 사람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풍 나온 아이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동물원까지 밀려나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게다가 밤이면 "나체팅"을 즐기려는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밤(나이트) 벚꽃(체리블라섬) 미팅"의 앞뒤 글자를 하나씩 뽑아 만든 나체팅은 7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처럼 번지며 한때 큰 인기를 끌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암표는 물론 위조 입장권까지 성행했다. 주변 식당가에서는 당시 400원 하던 비빔밥을 500원으로 올려 받는 등 바가지요금이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창경원의 독주는 1984년부터 진행된 창경궁 복원 사업에 의해 역사를 멈췄다. 놀이시설은 모두 철거됐고 벚나무는 어린이대공원과 여의도로 옮겨졌다. 또 동물들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1986년 지금의 창경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반세기를 이어온 명물 남산 케이블카

1962년 5월 처음 운영을 시작한 이래 50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의 명물. 운영 초기 탑승요금은 편도 20원으로,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값이 약 2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참고로 현재의 케이블카 대인 편도 요금은 6000원, 짜장면 가격은 4000원 내외)

남산 케이블카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며 서울의 대표 위락 시설로 자리를 잡아갔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팔각정에 들러 시내 전경을 감상했다.


1964년에는 케이블카 안에서 남녀 한 쌍이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28세였던 최상만 군과 정영순 양은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전남 영광에서 서울까지 올라왔고, 케이블카 안에서의 특별한 결혼식을 통해 부부로 거듭났다.


한편 남산타워는 1980년 처음으로 전망대를 공개하면서 관광오락시설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69년 전파탑과 관광용 전망대를 목적으로 착공됐으나, 보안상의 이유로 1975년 체신부가 인수․운영해오다 5년만에야 비로소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Posted by 탑스미네랄
|

[반가운 여행]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신혼여행


     글 박은경 사진 박은경,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관광공사 DB

창경궁에서 제주도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

지난 50년간 누군가에게는 장기자랑의 무대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휴식처였을 그때 그 여행지들.


신혼여행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아름다운 여행.

모두가 꿈꾸던 밀월의 섬 제주도

제주도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도시 중산층 이상이나 꿈꾸던 호화 여행지였다. 당시 신혼여행 일정은 보통 2박 3일. 이 기간 동안 제주도를 여행할 경우 평균 10만원 내외의 경비가 필요했다. 이는 부산 5만원, 온양 2만원, 설악산 3만5000원과 비교했을 때 최대 5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70년대 후반 항공편을 이용해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수요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하더니 80년대 들어 본격적인 붐을 타기 시작했다.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는 주말만 되면 감색 양복의 새신랑과 분홍 투피스 차림의 새신부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항공사는 정기 여객기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특별기를 투입했다.


성산 일출봉, 천제연폭포 등 제주의 관광명소는 신혼부부들로 초만원이었다. 단골 사진 촬영지였던 유채꽃밭은 몸살을 앓았고, 관광안내원이자 사진사였던 택시 기사들의 수입은 날로 짭짤해져 갔다. 게다가 속칭‘길일’이라 불리는 날은 결혼식 날짜로부터 최소 2~3달 전에 예약해야만 항공편과 원하는 호텔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주도 위주의 신혼여행 패턴은 19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 이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커플들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으로 해외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제주를 점차 외면했다. 90년대 초까지 매년 10% 이상 증가세를 보이던 신혼여행객은 92년 54만8000명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서며 영원할 것만 같던 독주를 멈췄다.

신혼에서 황혼까지 온양온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온양온천은 1960~70년대 으뜸 신혼여행지로 명성이 높았다. 1971년 기준 2박 3일 일정에 드는 비용은 숙박비와 교통비, 식비를 모두 합쳐 2만원 수준(참고로 당시 워커힐호텔 1박 요금이 2만원이었다). 또 서울에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비용이나 거리면에서 큰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다양한 휴양시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장거리 신혼여행객이 늘기 시작하면서 온양온천은 쇠락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8년 수도권과 연결된 온양온천역의 개통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Posted by 탑스미네랄
|

[반가운 여행]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수학여행


글 박은경 사진 박은경,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관광공사 DB

창경궁에서 제주도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여행지들

지난 50년간 누군가에게는 장기자랑의 무대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휴식처였을 그때 그 여행지들.


수학여행 새우잠을 자도 마냥 즐거웠던 잊지 못할 시간들.

수학여행의 메카 경주

시대를 초월해 경주를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수학여행. 똑같은 교복 차림에 까까머리 남학생과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하루를 꼬박 달려 찾은 경주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들었다.

1970년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 대다수의 중고교 학생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아다니며 역사의 혼을 느끼고 사진으로 추억을 남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봄가을 서너 달 사이에 집중된다는 게 문제였다. 학생들은 턱없이 부족한 숙박시설에 새우잠을 자가며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고, 신문에는 수학여행을 떠나 식중독에 걸린 학생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심지어 1973년에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200여 명의 원주고등학교 학생들이 숙소를 잡지 못해 다방과 식당의 홀에 앉아 밤을 새우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한편 1972년에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생 60여 명이 우리나라로 수학여행을 오면서 화제가 됐다. 이들은 페리를 타고 부산에 도착, 나흘간 경주와 부여, 서울을 둘러본 후 항공편으로 귀국했다.

시골 학생들의 로망 서울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탔어요. 꼭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요.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건물들도 아주 높아요.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싶어요"


서울 학생들이 경주를 비롯해 설악산, 속리산, 강릉 등에서 자연을 마주하며 추억을 쌓았다면, 지방 학생들은 서울로 올라와 번화한 도심을 만끽하며 견문을 넓혔다. 


역사 체험이 가능한 창덕궁, 경복궁은 물론 현대식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남산과 어린이회관 등이 주요 코스였다.

능동 어린이대공원 역시 단골 장소였다. 73년 5월5일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연 어린이대공원은 개원 초기에는 하루 입장객이 30여만 명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용인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드림랜드, 롯데월드 등 첨단 종합위락시설이 속속 문을 열면서 어린이대공원의 관람객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Posted by 탑스미네랄
|

[7080 타임머신①] 5060세대들의 청춘시절, 연애의 재발견

‘슈퍼스타K 시즌5’ 화제의 참가자 김대성 스테파노의 연애시절 이야기


70~80년대 나눴던 연애방식을 추억 따라 가보자.

데이트장소, 사랑의 징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 등에서 묻어난 추억속의 아련한 커뮤니케이션이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편집자 주>



# 1981 명동...

M.net ‘슈퍼스타K 시즌 5’에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는 김대성 스테파노(60)씨. 그는 아내와의 이야기로 유명해졌다. 방송에서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20년 전 사별한 아내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결혼 이야기보다 결혼 이전의 이야기가 더 극적이다.

때는 1981년. 그 해는 김씨가 힘들었던 군대를 전역한 해였다. 이 땅의 모든 청춘이 그렇듯 김씨도 전역이라는 해방감을 친구들과 함께 누리고 있었다. 장소는 서울 명동의 조선호텔 건너편 ‘포시즌’이라는 술집. 늘 그렇듯 전역 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다. 회포는 거하게 풀었지만 고민에 대한 답은 시원치 않았다. 이윽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김씨의 앞에 눈부신 아가씨가 지나갔다. 대뜸 그 빨간 원피스의 여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지금 세대였다면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락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흉흉한 요즘이라면 자칫 치한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첫눈에 반한 그녀를 놓치기 싫었던 김씨는 버스 안에서 용기 내 운을 뗀다. 정말 ‘대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만납시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말에 그녀가 진저리를 치며 얘기한다. “당신 미쳤어요?” 그야말로 미친 놈 취급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리는 정류장에 따라 내린 것.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집 전화번호를 건넸다. 연락을 달라고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간절하게 부탁했다.

“3월 1일 1시, 명동에 있는 서울 다방에서 기다릴게요.”

떨리는 한마디를 꺼낸 뒤 그는 유유히 사라졌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면서 설렘은 커져갔다. 근데 정말 공교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약속된 날짜를 이틀 남겨놓고 김씨가 급성 맹장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3월 1일 1시 서울다방’ 뿐.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친구에게 부탁해 혹시 그녀가 오면 내 상황을 설명해 주라고 한 것. 그러나 그것도 헛수고였다. 그녀는 서울 다방에 나오지 않았다. 김씨에게 ‘3월 1일 1시 서울다방’ 은 메아리 없는 설렘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구에게 한 가지 더 부탁했다. 여기에 왔다 갔다는 쪽지를 다방에 남겨달라고 말이다.

원본보기
메모와 쪽지는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휴대폰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로맨스, 인스턴트 로맨스가 아닌 아날로그 로맨스, 기다림의 로맨스였던 것이다.

김씨에게 그녀는 옷깃만 스친 인연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잊히지 않았다. 퇴원 후,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였지만 무작정 망원동 홀트아동복지회로 향했다. 첫 만남 당시 알고 있던 정보인 ‘망원동의 조씨’라는 것만 믿고 말이다. 당시 망원동 교통의 요지는 ‘홀트아동복지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기다리면 그녀와 마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곳으로 출퇴근한 지 하루, 이틀, 사흘을 지나 열흘이 흘렀다. 그러나 마주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아니 끝인 듯 했다.

그렇게 잊혀가는 듯했다. 금세 일상으로 돌아왔다.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어느새 가을이 됐다. 선배가 명동에서 운영하는 구둣가게를 찾았다. 선배와 일상적인 대화의 꽃이 무르익을 무렵 김씨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눈을 찡그리며 실눈을 뜨고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망원동 그녀였다. 이야기를 끊고, 선배에게 물었다.

“저기 일하는 사람 망원동 살아요? 혹시 성이 조씨예요?”

선배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씨는 확신했다. ‘이게 인연이라는 거구나.’ 이후 상황은 급진전됐다. 자연스럽게 말할 기회도 생겼고, 만남도 가졌다. 그리고 3월 1일 서울 다방에 왜 나오지 않았는지, 망원동에서는 왜 보이지 않았는지 모두 들을 수 있게 됐다. 다소 불량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만남에 응하지 않았던 것. 망원동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은 공교롭게도 3월 1일 즈음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악에 미쳐 베짱이 같은 놈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만남과 만남이 이어져 애정에 싹이 텄다. 남한강 데이트, 일터 데이트 등을 통해 애정을 키워나간 끝에 그들은 결혼에 골인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애틋한 사랑. 7080을 살았던 세대들의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에는 순수함이 있다. 요즘 세대들은 편지를 전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편지지를 몇 번이고 찢고 찢은 이야기를 믿기나 할까. 편지와 메모 그 필체에서 전해지는 진한 감성은 점차 사라져 간다. 7080을 살아온 세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길.

출처  브라보마이라이프, 양용비 기자 dragonfly@bravo-mylife.co.kr

Posted by 탑스미네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