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의 두 얼굴
인플레이션은 누구의 돈을 훔쳐갈까?
인플레이션(inflation)은 소리 없는 도둑일까? 아니면 난폭한 강도일까? 카푸친 씨는 인플레이션이 보통사람들의 피땀 어린 금융저축을 훔쳐가는 비열한 도둑이라는 통념을 갖고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통화를 타락시키는 것보다 기존의 사회 기반을 뒤집는 더 교묘하고 확실한 수단은 없다(There is no subtler, no surer means of overturning the existing basis of society than to debauch the currency)”고 했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자본주의를 파괴할 가장 좋은 방법은 통화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셀롯 씨의 생각은 다르다. 때로는, 그리고 누구에겐가는 인플레이션이 오히려 고마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은 인플레이션이 부리는 마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1946년 헝가리에서 일어났다. 그 해 7월 한 달 동안에만 헝가리 펭고(pengő)화로 표시한 물가는 41,900,000,000,000,000%(4.19×1016%)나 치솟았다고 한다. 하루 물가상승률이 207%에 이르고, 15시간마다 물건 값이 두 배로 뛴 셈이다.
2008년 11월 짐바브웨 월간 물가상승률은 7.96×1010%(하루 98%)였고, 1994년 1월 유고슬라비아의 인플레이션은 3.13×108%(하루 64%)에 달했다. 우리가 가장 극악한 사례로 들었던 1923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이들에 비하면 약과였다. 그 해 10월 독일의 월간 물가상승률은 29,500%였다. 3.7일마다 물건 값이 두 배로 뛰었다는 이야기다. [Steve H. Hanke and Alex K. F. Kwok, ‘On the Measurement of Zimbabwe’s Hyperinflation’, Cato Journal 2009년 봄/여름호]
하루 100% 가까운 물가상승을 기록한 짐바브웨의 경우를 보자. 짐바브웨달러를 들고 있던 이들은 하룻밤 자고 날 때마다 그 돈의 값어치(구매력)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악몽 같은 현실에 부딪혔다. 그 돈의 구매력은 열흘만 지나면 1,00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0.510=0.00097]
그가 이 돈을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자 없이 빌려주었다면 그가 열흘 후 돌려받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정글피자는 빌려줄 때 살 수 있었던 피자의 1,00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자를 받더라도 이자율이 하루 100%에 못 미치는 한 채권의 실질가치는 폭락한다.) 하지만 돈을 빌린 이는 어떻게 될까? 그는 열흘 만에 빚의 무게가 1,000분의 1로 줄어드는 거짓말 같은 마술을 경험하게 된다.
초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이야기는 예상을 뛰어넘는 인플레이션이 채권자와 채무자의 부(wealth)를 제멋대로 재분배하는 요술을 부릴 수 있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빚을 준 이도 ‘빚쟁이’ 빚을 얻은 이도 ‘빚쟁이’다. 인플레이션은 이 두 빚쟁이의 이해가 날카롭게 부딪치게 한다.) 뜻밖의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면 빚이 많은 오셀롯 씨의 어깨는 가벼워지지만 금융저축이 많은 카푸친 씨는 땅을 치게 된다.
그러나 오셀롯 씨가 무턱대고 인플레이션을 기다리는 건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가 인플레이션의 마술을 기대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인플레이션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일 것(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이가 충분히 높은 이자를 물리지 못할 것). 둘째,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적인 빚의 무게가 줄어들기도 전에 파산하지 않도록 충분히 버틸 힘이 있을 것.
오셀롯 씨의 반대 편에 있는 카푸친 씨가 인플레이션을 미워하는 까닭은 또 있다. 지난해 그의 연봉은 3% 올랐는데 물가가 2.8% 오르는 바람에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카푸친 씨는 늘어난 소득을 날강도 같은 인플레이션이 모두 빼앗아갔다고 분개했다. (하지만 샤먼 박사는 너무 분해 할 것까지는 없다고 말했다. 카푸친 씨가 사서 쓰는 상품과 서비스의 값이 오른 만큼 그가 파는 노동력의 가격도 올랐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무조건 강도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카푸친 씨의 연봉이 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카푸친 씨는 인플레이션을 하나의 세금으로 본다. 현금 보유자들이 다 같이 물어야 하는 세금이다. 이 세금을 줄이려면 수중의 현금을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여놓고 돈 쓸 데가 생길 때마다 은행을 오가는 수밖에 없다. 그의 구두는 그만큼 많이 닳을 것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그의 부인은 음식 값이 바뀔 때마다 메뉴 판을 새로 만드느라 돈을 써야 한다. 이른바 구두창비용(shoeleather cost)과 메뉴비용(menu cost)이다.
이는 인플레이션 때 현금 보유를 줄이고 가격 조정을 자주 해야 하는 개인과 기업의 여러 가지 비용을 말한다. 카푸친 씨는 또한 인플레이션만큼 명목소득(근로소득, 이자소득, 양도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그만큼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게 억울하다. 저축을 할수록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후반 경제학계의 가장 큰 거목으로 꼽히는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Inflation is always and everywhere a monetary phenomenon)”이라고 했다. 인플레이션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카푸친 씨는 익히 들어본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1911년 어빙 피셔(Irving Fisher)가 고안한 화폐수량방정식(quantity equation)부터 떠올렸다.
통화량(M)과 통화유통속도(V)를 곱한 값은 생산품의 가격(P)과 생산량(Y)을 곱한 값과 언제나 같다. 정글피자 한 가지만 생산하는 단순한 경제를 생각해보자. 이곳 사람들은 한 해 피자 100개를 만들어 2만 원씩 받고 판다. 이 곳에 돌고 있는 돈이 100만원이라면 통화유통속도는 2가 된다. [2만원*100개/100만원=2] 명목국내총생산(명목GDP)이 200만원인 정글경제에 100만원의 통화가 공급됐다면 그 돈은 한 해 평균 두 차례 손바뀜이 일어난다.
통화유통속도(V)가 거의 변하지 않고 생산량(Y)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통화량(M)은 고스란히 물가(P)에 반영된다. 정글경제의 통화유통속도와 피자 생산량이 일정할 때 통화량을 두 배로 늘리면 물가는 두 배로 뛰게 된다. 초인플레이션은 통화 증가가 곧바로 물가 상승으로 나타나는 극단적인 경우다.
정글경제 사람들이 늘어난 돈을 다 쓰지 않아 돈의 손바뀜이 느려지면 어떻게 될까? 통화 증가가 그대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통화유통속도가 안정적이라고 보는 통화주의자(Monetarist)와 이를 반박하는 케인지언(Keynesian)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실제 한국 경제의 통화는 예로 든 정글경제보다 훨씬 느리게 돈다. 명목GDP를 광의통화(M2)로 나눠서 구한 통화유통속도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1.3정도였으나 최근에는 0.7로 떨어졌다.
변수가 기껏해야 네 개밖에 안 되는 화폐수량방정식(MV=PY)은 카푸친 씨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하게 볼 게 결코 아니었다. 통화량을 적절히 늘리거나 줄임으로써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꾀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물가를 안정시키려 통화증가율을 조절하던 각국 중앙은행들은 결국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로 돌아섰다. 인플레이션을 어떤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에 맞춰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이기보다) 금리를 내리거나 올리는 정책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물가예측에서 통화량의 역할이 제한적이라고 보는 뉴케인지언(New Keynesian)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물가안정목표제를 채택했다.
물가안정목표제는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플레이션이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무르는 가운데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대완화(Great Moderation)의 시대를 맞았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연 평균 3%에 그쳤다.) 중앙은행과 통화정책 수장들에 대한 신뢰도 크게 높아졌다. 금융위기의 쓰나미가 세계를 덮칠 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대완화를 구가하며 자만에 빠져 있던 이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호된 비판을 받게 됐다. 인플레이션 타기팅은 비판의 타깃이 됐다. 중앙은행들에게는 소비자물가지수(consumer price index)만 쳐다보면서 금리를 너무 낮게 너무 오랫동안 끌고 가 자산시장 거품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인플레이션 타기팅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 중에는 인플레이션 목표치(대부분의 나라에서 2%)가 너무 낮아 과감한 금리 인하가 필요한 때 금리를 내릴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인플레이션 목표를 4% 정도로 높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다. 빚이 많은 오셀롯 씨가 반길 만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통화가치를 지키려는 중앙은행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믿음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후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을 둘러싼 논리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밀튼 프리드먼은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강연의 끄트머리에서 19세기 말 프랑스 의회의 피에르 S. 듀퐁(Pierre S. du Pont) 의원이 아시냐(assignat 가치가 폭락한 프랑스 혁명기의 화폐)의 추가 발행 제안에 관해 했던 연설을 인용했다. “못된 이들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보다 잘못된 논리를 펴는 이들이 뜻하지 않게 저지르는 범죄가 더 많습니다.” 통화정책을 둘러싼 논리싸움을 벌이다 뜻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게 될 이는 누구일까? 금융위기 이후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에 대한 경제학자들과 정책당국자들의 생각이 바뀌면 오셀롯 씨와카푸친 씨 가운데 과연 누가 웃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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